우리WON스토리

도전과 영광의 발자취를 기록과 리뷰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성인 농구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팀은 바로 우리은행이다. 1958년 상업은행이란 이름으로 창단한 이들은 국내무대를 평정했고, 더 나아가 팀의 대표선수들은 세계에 한국여자농구의 위상을 떨쳤다. 80년대 과도기를 거친 이들은 WKBL 출범 후에도 열한 번의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농구명가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

1911년 첫 선을 보인 여자농구는 남성주의사회에서 편견을 극복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1920년대 어느 대회에서는 임원들을 제외한 남성들의 경기장 출입을 아예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농구경기에 출전한 여성이 집에 돌아가서는 말괄량이라고 해서 매 맞기가 일쑤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여성들의 스포츠 참가는 지속적으로 늘었고, 어느덧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국민스포츠로 발돋움해 최전성기를 누렸다. 그 시기가 바로 한국 경제발전이 시작된 1960년대와 70년대였고, 그 주체는 바로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이었다. 상업은행은 국내외에서 막강한 전력을 발휘하면서 사랑을 받아왔고, 특히 상업은행의 슈퍼스타 박신자는 세계가 인정한 선수로 그 인기와 관심은 오늘날 박지성 이승엽 못지않았다. 박신자가 뛰던 시절, "박신자가 선수로 있는 이상, 일본은 한국을 절대 이길 수 없다"라는 말도 있었다.

1950년대 사진

상업은행의 시작

1958년 창단한 상업은행의 첫 경쟁자는 바로 한 발 앞서 창단한 한국은행이었다. 김인건 KBL 이사의 부친이자 초창기 한국농구를 이끈 故 김정신 선생이 이끈 한국은행은 57년 4월에 창단해 국내 무대를 휩쓸고 있었다. 여기에 상업은행이 도전장을 내밀면서 금융 라이벌전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는 큰 의미가 있다. 김정신 선생을 비롯한 농구인들은 "여자선수들의 기량이 언제까지나 고교수준에서 머물 수는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이 의욕을 갖고 농구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터에 생긴 은행팀은 선수들에게는 큰 인기였다. 부모들 역시 딸의 취업까지 보장해주는 은행팀의 창단을 환영했다.

장이진 코치가 이끈 상업은행의 첫 해는 고달팠다. 58년 7월18일 개막한 「여자우수팀리그전」에 출전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숙명여대를 31-30으로 꺾었지만 정작 맞수 한국은행에게는 61-35, 55-32로 비참히 패했다. 2차리그전에서 가진 재대결에서도 72-47로 완패했다. 한국은행의 전정희를 당해내지 못한 탓이었다. 상업은행은 59년 봄 숙명여고를 졸업하는 박신자 잡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한국여자농구 최고의 인재로 여겨졌던 박신자만 잡으면 단숨에 전력상승을 이룰 것이란 기대감에서였다.

상업은행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간 박신자는 마침 해체된 숙명여대의 김영자와 함께, 상업은행에 가세하면서 그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다. 비록 59년 7월에 열린 「여자우수팀리그전」에서도 한국은행에 71-49로 패했지만, 전반에 35-24로 끈질기게 따라붙는 등 성과는 있었다. 오히려 이 패배 후 선수들은 파이팅을 다짐했고 결국 3개월 뒤 열린 「전국체전」에서는 44-38로 승리하면서 마침내 한국은행에게 승리를 따냈다. 이는 큰 의미가 있었다. 잠시나마 한국여자농구를 평정했던 한국은행이 경쟁자에게 횃불을 넘겨주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가 두 팀은 「제14회 종합선수권대회」에서 다시 만났는데, 이때도 상업은행이 박신자의 중거리 슛으로 45-43으로 승리했다.

상업은행 발전의 원동력에는 은행측의 든든한 지원과 함께 침착하고 노련했던 장이진 코치의 지도가 있었다. 훗날 박신자는 회고했다. "다른 감독들은 팀이 지면 흥분부터 했다. '뭐하는 거야! 하라는 짓은 안하고…' '너 아까 그걸 슛이라고 해?' 등 누구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장 코치는 선수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고 조용히 자신감을 더해주는 편이었다."

또, 원로 체육기자 조동표 선생은 2007년 발행한 저서 <96년만의 덩크슛>에 이렇게 기술해놓았다. "장 코치는 선수들 실력을 키우는 데만 심혈을 기울인 것이 아니었다. 예정된 경기에서 상대팀이 어떤 전술로 나올 것인지, 거기에 대응해 자신은 어떤 선수를 기용해 어떤 전술로 맞설 것인지 정밀하게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신생팀은 재빨리 한국여자농구를 대표하는 팀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사진

박신자 전성시대

한번 불붙은 상업은행의 기세는 대단했다. 체육지면의 대부분은 상업은행 이야기였고, 박신자는 여자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라이프 스토리가 연재되어 인기를 모았다. 1963년 2월 20일, 일간스포츠가 창간기념 사업으로 장충체육관에서 개최한 「박정희 장군배 쟁탈 동남아여자농구대회」에 출전한 상업은행은 1차 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상업은행은 박신자 시대가 마무리 됐던 5회 대회까지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농구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해프닝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1961년 2월 28일 비공식 한일전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 전지훈련 중이던 상업은행은 오사카의 니찌보 히라노와 맞대결을 펼쳤다. 니찌보는 당시 일본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여자농구 팀이었다. 전반을 24-23으로 뒤졌던 상업은행은 막판까지 1점차로 리드를 당했으나 종료 10초 전, 심판의 파울 선언으로 자유투 2구를 얻었다. 63-63의 박빙의 순간. 쐐기를 박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박신자는 자유투 1구를 실패했지만, 2구째를 성공시켰다. 64-63으로 간신히 리드를 지키면서 승리까지 챙긴 상업은행. 이들에게 이 경기는 '한국인이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경기'로 남아있다. 상업은행 선수들은 이후 안죠 대학에서도 연습 경기를 가졌는데, 경기 후 한 일본 교수가 그때서야 "나는 사실은 한국인입니다"라고 고백해 눈물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이 경기는 박신자 선생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꼽고 있다.

세계를 놀라게 하다

국내무대에서 1961년부터 시작된 한국은행과의 정기전으로 큰 인기를 얻은 상업은행은 계속해서 승승장구했다. 상업은행의 경기가 있는 날, 경기장은 수용인원이 큰 의미가 없었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 그 인기를 실감케 했다. 그 인기는 제일은행과 한일은행 농구부의 창단(1962년)을 몰고 왔고, 이어 동신화학 한국전력 조폐공사도 등장했다. 1963년에는 조흥은행 국민은행 서울은행이 팀을 만들었고, 이들의 행보와 발맞추어 여중 여고에도 농구부가 탄생해 농구인기의 꽃을 피웠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조동표 선생은 "농구의 전성기였다. 지금에 비하면 토양이 아주 비옥했던 셈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상업은행은 단연 넘버 원(No.1)이었다. 한국여자농구를 대표했던 이들은 1964년 4월, 페루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애초 다른 팀 선수들을 포함해 최고 전력으로 출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지만, 상업은행은 단일팀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게 됐다. 박신자와 김영자 신항대 등이 활약한 상업은행은 아르헨티나에 87-58로 이겼고, 체코와는 연장 접전 끝에 77-72로 패했다. 세 번째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는데, 체력의 열세로 60-57로 졌다.

그러나 상업은행의 분전은 무명의 한국농구를 세계에 알렸다. 상위리그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프랑스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그리고 숙적 일본과 맞붙어 거둔 성적은 4전 전승. 8위에 해당하는 쾌거였다. 이러한 혈투를 치른 뒤에야 상업은행은 "베스트 전력을 가져갔으면…"하며 아쉬움을 삼켰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박신자는 심판들이 선정한 대회 베스트 5에 이름을 올리면서 위상을 떨쳤다. 처음으로 국제대회에서 모습을 드러낸 한국이, 그것도 아무런 정보 없이 참가한 단일팀에서 주전 센터가 베스트 5에 이름을 올린 것은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계속된 독주

상업은행의 라이벌로는 60년대 초반의 제일은행이 유력하게 꼽힌다. 한국은행이 스타 스카우트에 실패하면서 전력 약화로 해체하자 제일은행이 등장했고 이들은 숭의여고 주희봉을 영입하면서 상업은행에 맞불을 놓았다.

상업은행도 최대어였던 김추자를 영입하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김추자는 훗날 67년에 열린 「제5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기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던 선수로 조흥은행이 해체하면서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리게 됐고, 상업은행은 제일은행과의 경쟁 끝에 그녀를 잡는데 성공했다.

일각에선 박신자 김명자 김추자 트리오를 ‘삼보(三寶)’로 일컬었는데, 국내는 물론이고 일본에서조차 그들의 독주를 막을 길이 없어 보였다. 64년「제4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우승, 12월에 열린 「제19회 전국남녀농구선수권대회」 우승을 비롯해「제20회 종별선수권대회」(65년 5월), 「추계서울여자실업연맹전」(65년 10월), 「춘계전국여자농구리그전」(66년 3월), 「제21회 전국종별선수권대회」(66년 6월) 등…60년대에 상업은행이 휩쓴 상은 대단했다. 한마디로 적이 없었던 셈이다. 오랫동안 상업은행을 이끈 장이진 코치가 신흥 명문 제일은행으로 이적했음에도 불구, 그들은 꿋꿋했다. 66년 김광일 코치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뒤 이상훈 코치가 팀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동요가 있긴 했지만, 선수들은 이상훈 코치의 혹독한 수련을 이겨내면서 정상의 자리를 지켜갔다.

20세기 한국스포츠 20대 사건

상업은행 스타들은 국제대회에서도 한국의 위상을 떨쳤다. 특히 박신자는 65년 4월에 열린 「제1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도 그 위력을 유감없이 보였는데 일본과의 두 차례 맞대결에서 평균 30득점을 올리면서 한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베스트 5에 이름을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당시 박신자는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지극 정성이 담긴 모두의 부탁에 못 이겨 코트로 돌아온 그는 그렇게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그러나 농구인들과 원로체육기자들은 67년 「제5회 세계선수권대회」야 말로 국민들을 감동시킨 최고의 무대라 말한다. 이 대회에는 박신자를 비롯해 김추자 김명자 채현애 신항대 등의 상업은행 선수가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고, 라이벌 제일은행에서는 주희봉 임순화 김영임 이혜숙도 대표팀에 합류했다. 감독은 농구협회 이사 이제학, 코치는 상업은행과 제일은행에서 모두 선두의 기쁨을 맛봤던 장이진 코치였다. 제4회 대회에서 정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던 장 코치는 확실한 정보전과 체력전으로 세계에 맞섰고, 그 선봉에는 박신자와 김추자가 있었다. 김추자는 4월 17일 체코전에서 종료 10여 초를 남기고 극적인 가로채기에 성공해 레이업을 성공시켜 67-66의 대역전승을 이끌어냈다.

박신자가 5반칙을 당해 패색이 짙었던 한국에겐 최고의 행운이었다. 이 경기는 상업은행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경기였다. 김명자는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 득점을 얻어냈고, 골밑에서 박신자는 몸싸움을 하며 리바운드를 잡아내는가 하면 정확한 피딩으로 동료들을 이끌었다. 한국은 이탈리아에 76-56, 유고슬라비아에 78-71로 이기면서 은메달을 목에 거는데 성공했다. 대회를 치르는 기간 내내 북한의 방해공작이 계속되었던 악조건임을 감안하면 한국이 세계대회에서 이뤄낸 어떤 쾌거보다도 값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대회는 99년 한국일보가 뽑은 <20세기 한국스포츠 20대 사건>중 하나로 선정됐다. 또 박신자는 체코대회 기자단 투표 결과 56표를 얻어 소련팀의 거인, 프로코펜코바를 제치고 월드 베스트 5에 1위로 선정됐다.

침묵

포스트-박신자 시대라 할 수 있는 70년대 한국여자농구는 한국화장품과 태평양화학이 양분하여 이끌어갔다. 이 시기 여자농구계에서는 '스카우트 전쟁'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드래프트가 실시되었고, 대한농구협회가 여자농구 발전을 위해 팀별로 5명씩을 뽑도록 유도하였지만, 금융팀들은 부담스러워했다. 다른 팀에 비해 돈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신자에 이어 김추자와 김명자까지 은퇴한 상업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이 분위기는 1977년 11월, 조선일보의 보도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매년 드래프트가 실시되는 11월은 각 팀 관계자들에게 분노와 좌절의 계절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드래프트라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드래프트 시스템과는 많이 달랐다. 졸업예정 선수들에게 취업팀 선택권을 부여해 실업 2개 팀, 금융 3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렇게 선택된 팀들이 다시 추첨으로 선수를 지명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형평성을 위한 드래프트라고 보기엔 선수의 선택권은 너무나도 날카로운 칼자루와 같았다. 또 선수 입장에서는 돈을 더 주는 실업팀에 더 가길 원했지만, 마지못해 금융팀에 갈 경우에는 사기저하 등도 우려되는 실정이었다.

1970년대 사진 이에 농구협회는 계약을 거부할 경우 아예 선수자격을 주지 않는 강경책으로 대항해 한번 지명된 선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즉, 은행팀에게는 드래프트야말로 전력 상승을 위한 최상의 카드였지만, 실업팀이나 선수들에게 은행팀은 '되도록 거부하고픈' 무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세대교체에 실패한 상업은행의 위력은 점점 시들해져갔다. 국가대표 주전 포워드였던 오명자와 서영숙, 주전 가드였던 황선애, 여기에 강귀애 등이 활약하면서 60년대를 화려하게 마무리했지만 70년대 중반부터는 큰 힘을 못 썼다. 70년대에 그들이 전국 규모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72년에 열린 「제10회 춘계전국여자실업리그전」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78년 아시안게임을 비롯한 국가대표 센터였던 조영란의 활약 덕분에 상업은행은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그 자존심은 이어갈 수 있었다.

1980년대 사진

신현수와 최애영

침체에 빠진 농구를 중흥시키고 겨울철 실내 스포츠로 정착시키기 위한 농구대잔치가 1983년에 마침내 닻을 올렸다. 80년을 기점으로 한 번 더 세대교체를 이룬 상업은행은 다람쥐를 마스코트로 하여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상업은행의 성적은 신통치 못했다. 선두권의 한국화장품 신용보증기금 코오롱 동방생명 등에 크게 못 미치는 공격력을 보인 것이다. 수비력에 비해 공격이 따라주지 않아 답답한 공격을 펼쳤는데, 농구대잔치 초창기에는 금융팀들이 모두 비슷한 사정이었다.

그러나 상업은행에 스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시기 최고 스타는 단연 최애영과 김순애. 비교적 단신이었던 이들은 각각 득점과 어시스트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팀을 이끌었는데 그 중에서도 최애영은 소속팀에서 뿐 아니라 국가대표에서도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줬다. 바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이 그 무대로, 당시 대표팀을 4승 1패로 2위로 이끌었던 조승연 감독은 "앞 선에서 최애영이 정말 잘 해줬다. 이형숙과 함께 앞 선에서 그렇게 조직적이고 빠른 움직임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상대가 하프라인을 넘는 것조차 버거워했으니까"라고 회고한다. 최애영은 입단 당시만 해도 그다지 큰 기대를 모았던 선수는 아니었다. 드래프트에서도 10위안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기량 순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선수가 바로 최애영이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그 시기가 그 만큼 선수층이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도 말한다. 또 조승연 감독을 도운 코치는 74년부터 상업은행을 지도해온 신현수 감독이었다. 신현수 감독은 80년대 중반 유수종 감독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세대교체 중인 팀을 이끌면서 국가대표 코치직도 겸임했다.

고전

최애영이 무릎부상에서 돌아와 분투한 85년은 상업은행이 '1위'를 경험한 마지막 해였다. 85년 「제66회 전국체전」에서 1위를 차지했고, 최애영이 현역에서 물러난 86년 이후 전국규모로 치러지는 대회 우승은 2003년 여자프로농구리그까지 가뭄이었다. (최애영은 WKBL 심판으로 활동하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해왔다) 사실, 농구대잔치 시절엔 매년 12월쯤에는 신예들을 소개하는데 많은 지면이 할애됐다. 그러나 주요 신인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유독 상업은행 선수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91년 은광여고 출신 178cm의 센터 조혜진이 권은정(신탁은행), 전주원(현대산업개발) 등과 소개되었을 뿐이었다. 새로운 스타의 발굴이 이어지지 않은 상업은행은 80년대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당시 국민은행이 매일 연승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승승장구한 것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이는 시상식 분위기에서도 잘 나타났다. 김순애(83년 자유투상), 박진숙(89년 수비상) 조혜진(93-94 수비상, 94-95 자유투상)을 제외하면 농구대잔치를 치르면서 베스트5는커녕 개인상 수상자조차 배출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간간이 강팀들을 잡으면서 저력을 보였지만 대체로 상업은행에게는 우울한 80년대였다.

1990년대 사진

돈만으론 이길 수 없다!

김명주 옥진경이 이끌고, 청소년대표 출신 조혜진이 골밑에 가세한 상업은행은 90년대에는 '근성 있는 다크호스'로 여겨졌다. 90년 「제45회 종별선수권 겸 제29회 춘계실업연맹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역시 91년과 92년에 춘계와 추계실업연맹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상업은행은 92년 농구대잔치에서도 그 근성을 앞세워 강팀들을 긴장케 했다. 특히 92년 12월 10일, 우승후보 SKC전에서는 57-54로 승리를 하면서 파란을 일으켰는데 이 경기를 보도한 신문 헤드라인 문구가 바로 "돈만으론 이길 수 없다"였다.

억대선수가 즐비한 SKC를 꺾은 것은 큰 수확이었다. 상업은행의 당시 1년 예산이 SKC 선수 1명의 스카우트 비 절반에도 못 미치는 4,500만원이었을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이 경기 후 SKC는 코칭스태프도 퇴진 압박을 받는 등 파장도 컸다. 상업은행은 이어 93년 농구대잔치에서는 우승후보 국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근성'의 힘을 발휘했다. 유수종 감독이 이끈 상업은행은 타이트한 변칙수비가 특징인 팀이었다. 경기 내내 상대를 60점대 이하로 묶기 위해 온 힘을 쏟아 부었고, 이를 위해서는 하루 5시간이 넘는 맹훈련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후문이다. 자칫 뒷심부족으로 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위기 극복

남자농구가 90년대 중반 연고대와 마지막 승부 열풍에 힘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과는 달리 여자농구는 농구대잔치 후반기로 갈수록 관심이 줄어들어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단순한 '오프닝게임'정도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분석이 있는데, 유수종 감독은 "대학팀들이 실업팀들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관중들의 관심이 남자농구로 쏠리기 시작했다. 인기가 떨어지다 보니 금융단을 모기업으로 두고 있는 농구단은 예산지원이 줄었고, 있으나마나 한 운영이 계속됐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도 했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선수층과 경기 수준에서 찾을 수 있었다.

조승연 감독은 "고등학교에서 배출되는 선수의 양은 늘지 않고 있는데, 팀만 급격하게 늘어버리니 게임의 질이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실업팀이 고등학교 대회 우승팀에게도 지는 일도 있었다. 선배들께서도 '옛날 같았으면 뛰지도 못했을 선수들이 주전으로 뛴다.'고 한탄했다. 이 부분은 유 감독도 동의한다. "잘 하는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스타구단이 탄생하지 못했다"며 말이다. 심각해진 여자농구 관계자들이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팬들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바로 프로농구였다. 물론 프로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상업은행을 비롯한 금융단은 프로화를 반대했다. 아마추어로 남아서 실업대회로 명맥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신용보증기금은 드래프트까지 마친 상태에서 해체되는 등 우여곡절이 심했다. SK 증권도 사내 구조조정으로 해체의 길을 걸으면서 WKBL의 출범은 난항을 겪었다. 그러나 마침 신세계가 창단하고 상업은행과 국민은행이 프로에 합류하면서 WKBL은 5개 구단으로 1998년에 그 닻을 올릴 수 있었다.

15년만의 정상 도전

IMF를 돌파한 상업은행은 98년 한일은행과 합병하면서 한빛은행으로 재탄생 했다. 재탄생 뒤에는 직원들의 모금운동과 은행측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다. 또 한빛은행이 여자농구 스폰서를 맡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선수들도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이대로 농구를 그만둬도 은행 직원이 되는 상황이었기에 사실 선수들의 앞날은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였다. 그러나 회사측에서 힘을 써주니 선수들도 농구에 더욱 열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 유수종 감독의 말이다. 「98 라피도컵 여름리그」에서 3위를 기록한 한빛은행은 「한빛은행배 99여자프로농구리그」에서 베이징 수도강철을 90-71로 꺾으면서 결승행을 확정 지었다. 유 감독에게 결승 진출은 88년 감독 취임 이후 처음이었다. 상대적으로 재정지원이 풍부했던 실업팀 기세에 밀려 전전긍긍하길 11년. 한빛은행 역시 85년 10월 상업은행 시절 「제66회 전국체전」우승 후 첫 정상 도전이었기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결승 상대는 신세계. 사실상 SK시절 한솥밥을 먹던 선후배인 정선민과 이종애의 대결이었다. 정규리그 중 맞대결에서 한 차례 신세계를 69-66으로 꺾었고 당시 정선민을 17점으로 묶은 바 있기에 한빛은행은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챔프전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진통제를 맞고 출전하는 등 투혼을 보인 정선민은 신세계를 2경기 만에 우승으로 이끌었다. 챔피언이 결정됐던 2차전에서, 이종애는 20점을 올리고 조혜진은 16점 6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2쿼터에 단 13점에 묶이면서 15년만의 우승에는 실패했다.

2000년대 사진

정상에 서다

"4차전 경기장에 들어서는데 왠지 좋은 예감이 들더군요. 오늘 끝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요." 우리은행이 「우리금융그룹배 2003 WKBL 겨울리그」에서 삼성생명과의 챔피언결정전 시리즈를 마친 4차전. 정규리그 MVP 조혜진의 우승 소감이었다.

1999년에 준우승을 차지한 뒤 2001년 또 한 번 고배를 마신 한빛은행은 그 사이 우리은행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정상에 도전하고 있었다. 99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한 홍현희는 나날이 성장했고, '블록슛의 여왕' 이종애는 자신만의 전설을 써가고 있었다. 「삼성비추미배 2001 여자프로농구 겨울리그」에서는 195cm의 노장 쉬춘메이를 앞세워 당대 최강 신세계를 2승 1패로 꺾고 챔피언결정전에 올랐지만, 삼성생명의 노련미에 밀려 우승에 실패했다. 그러나 「우리금융그룹배 2003 겨울리그」에서는 두 번 울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던 타미카 캐칭이 가세하면서 전혀 다른 팀이 된 것이다.

1라운드에서부터 남다른 기량으로 돌풍을 일으킨 캐칭은 NBA 선수였던 하비 캐칭스의 딸로 이미 WNBA와 미국 국가대표팀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충분히 다진 스타였다. 우리은행은 2003년 1월 23일, 현대를 꺾으면서 창단 이래. 최다인 6연승을 달렸고, 1월 30일에는 신세계를 85-62로 대파하면서 가장 빨리 전 구단을 상대로 승리를 챙겼다. 그 기세는 3월까지 이어져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플레이오프 4강에서는 신세계에 2승 1패로 이기면서 통산 3번째 챔피언결정전 무대에 도전했다. 챔프전 상대는 라이벌 삼성생명. 1차전에서 우리은행은 정규리그동안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삼성생명에게 89-78로 패해 흔들리는 듯 했다. 변연하는 이 경기에서 3점슛 6개를 터트리며 26점을 기록해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러나 시리즈는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은행은 이후 내리 승리를 챙기며 창단 후 첫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날 선수들 모두 원 없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우승 청부사, 캐칭

겨울리그에서의 우승 감격도 잠시. 몇 개월 뒤 열린 여름리그에서 우리은행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가드 전력이 약한 탓에 김지윤 김영옥 등만 만나면 휘둘리기 일쑤였다. 순위도 3위와 4위를 오르내리면서 우승팀의 면모를 쉽게 보이지 못했다. 그랬던 우리은행에게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바로 캐칭이었다. 캐칭은 WNBA 정규시즌에서 소속팀 인디애나 페버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자 한국의 친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침 플레이오프에서 해결사가 필요했던 우리은행이 캐칭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정선민이 이끌던 정규리그 2위 신세계를 2경기 만에 가볍게 제압한 우리은행은 챔피언결정전에서 다시 한번 삼성생명과 숙명의 시리즈를 펼쳤다. 삼성생명은 바우터스를 앞세워 정규리그 15연승을 달린 강호. 그러나 내·외곽에서 치고 빠지는 캐칭의 스피드는 바우터스의 높이도 속수무책이었다. 1차전에서 28득점 14리바운드를 기록한 캐칭과, 3점슛 4개를 100% 성공시킨 조혜진(21득점)의 활약에 삼성생명은 81-71로 고배를 마셨다. 비록 2차전에서는 덜미를 잡혔지만 우리은행은 3차전을 이긴데 이어 4차전에서 캐칭의 23득점 25리바운드 8어시스트라는 괴물 같은 활약을 앞세워 75-70으로 승리, 2회 연속으로 우승의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긴급공수(?)된 캐칭은 '우승 청부사'라는 별명처럼 바람처럼 나타나 팀에 우승을 선사했다. 훗날 춘천시는 캐칭에게 '명예 시민증'을 선물하며 그 우승에 화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캐칭만이 잘해서 얻은 우승은 분명 아니었다. 팀의 고참 이종애와 조혜진 콤비는 내·외곽에서 캐칭을 지원했고, 아직은 미숙했지만 김나현과 김지현 역시 가능성을 보였던 플레이오프였다.

조혜진의 은퇴

2003년, 우리은행이 여름리그에서 통산 2번째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방송 카메라가 가장 먼저 잡은 국내선수는 바로 조혜진이었다.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묵묵히 팀을 이끌어왔던 캡틴이었기 때문이다. 은광여고 출신으로 92년에 팀에 입단한 조혜진은 뛰어난 개인기로 팀을 이끌었지만, 조용한 성격인데다 팀의 부진까지 겹쳐 같은 시기 여자농구에 데뷔한 스타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 못했다. 플레이오프가 치러지는 동안에도 언론이 타미카 캐칭에 집중하는 동안, 그는 묵묵히 이종애 홍현희 등과 힘을 거들었다.

조혜진은 2003년에 현역에서 물러나 플레잉 코치로 활동하게 된다.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2005년 3월 겨울리그를 끝으로 완전히 선수 생활을 접은 조혜진의 공식 은퇴식은 2005년 8월에 열린 WKBL 올스타전에서 이뤄졌고, 평소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조혜진'이라고 말했던 우리은행 농구단 선수 전원은 꽃다발을 건네며 선배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 WKBL 김원길 총재 역시 기념메달을 전달했다.

명문 도약 길 열어준 2005년 우승

2003년의 두 차례 우승 후 우리은행은 월드챔피언십에 출전해 세계굴지의 팀들과 기량을 겨루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우승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법. 보다 장기적인 계획을 위해선 변화가 필요했다. 그 첫 발걸음은 김영옥의 트레이드였다. 2004년 9월 14일 단행된 이 트레이드로 우리은행은 보다 빠른 가드진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김계령의 영입이었다. 삼성생명의 기둥이자, 우리은행의 골칫거리였던 김계령은 2004년 11월. FA 시장의 5년(1억 2천만원) 계약에 우리은행으로 이적했다. 이러한 변화로 탄생한 우리은행은 멀티 가드 시스템을 앞세운 신바람 농구로 「2005 KB스타배 여자프로농구」를 평정했다.

WNBA 출신의 외국인선수 캘리 밀러와 김영옥의 스타일이 비슷해 한동안 자리를 찾지 못했지만, 이내 이들의 장점을 두루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의 변환을 택하면서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또 이종애-김계령-홍현희의 장신 라인업 역시 상대에게 위협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고 4강 플레이오프에서 국민은행을 만난 우리은행은 연장 접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인 끝에 승리, V3를 향해 갈 수 있었다.

챔프전 상대는 이번에도 노련미를 내세운 삼성생명이었다. 그러나, 김계령은 친정팀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3차전에서 20득점 9리바운드로 골밑을 휘저으면서 3연승을 이끌었다. 통산 3번째 우승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이 우승은 우리은행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앞서 2번의 우승이 캐칭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면, 3번째 우승은 새 식구 김영옥과 김계령의 활약이 큰 역할을 하면서 외국인선수 밀러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다. 여기에 김지현과 같은 신예들이 고비마다 투입되어 알토란같은 도움을 준 점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V4, 그리고 여자농구 최강의 팀으로

「신한은행배 2005 여름리그」에서도 질주는 계속됐다. 일찌감치 6연승을 달리면서 선두권을 지킨 우리은행은 김계령이 7월 25일 신한은행전에서 부상을 당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슈터 김은혜가 급성장하고, 김영옥이 맹활약하면서 선두권을 놓치지 않았다. 위기마다 적진을 파고들어 '한 건'해준 김영옥은 말 그대로 '해결사'였다. 시즌 중반 코뼈 부상을 입어 수술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불구, 김영옥은 병원이 아닌 코트를 택하는 투지를 보였고, 덕분에 겨울리그에 이어 또 한 번 MVP를 수상했다. 시즌 중반부터 재차 7연승을 달리면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우리은행은 그러나 챔피언결정전에서 신한은행과 격돌했으나 우승에는 실패, 통산 네 번째 우승 트로피는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2005 여름리그를 통해 우리은행이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연고지인 춘천에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는 점이었다. 그 바탕에는 확실한 홈 성적이 있었다. 홈에서 6승 1패를 기록하면서 춘천 팬들에게 이름을 확실히 알렸다.

비시즌간 절치부심한 우리은행은 「금호아시아나배 2006 겨울리그」에서 4번째 우승에 도전했다. 출발은 2연패로 좋지 못했지만 라이벌 삼성생명을 상대로 그 시즌 최다득점을 올리면서 103-76으로 시즌 첫 승, 다시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한번 승리 맛을 본 우리은행의 기세는 캐칭의 가세로 더욱 강해졌다. 일정 문제로 합류가 늦은 캐칭은 컴백과 동시에 리그를 휩쓸었다. 입국 하루 만에 치른 1월 5일 홈경기에서 캐칭은 30점 17리바운드 3스틸 2블록으로 경기를 제압, 우리은행 역시 95-61로 승리를 챙겼다. 이때부터 우리은행의 관심사는 연승행진이 됐다. 2월 10일 국민은행전까지 12연승을 달리는 동안 우리은행의 전력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였다. 고무적인 것은, 캐칭 한 명의 활약이 아닌 국내선수의 활약이 더 큰 영향을 줬다는 점이었다. 마치 '캐칭의 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김영옥과 김계령, 김은혜 김보미 등이 두루 가세하면서 매 경기 함박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삼성생명의 15연승 기록에 도전하던 우리은행은 비록 금호생명에 패하면서 역대 최다연승 도전에는 실패했지만 정규리그 3연패를 확정지으면서 V4에 도전했다. 챔프전 상대는 또 다시 신한은행. 캐칭과 같은 WNBA 출신인 태즈 맥윌리엄스가 공수에서 맹활약했지만 이번만큼은 우리은행을 꺾진 못했다. 2차전에서 김영옥이 트리플-더블에 가까운 활약을 펼친 우리은행은 61-51로 이기며 첫 승을 따냈고, 이어 3차전에서는 캐칭이 23점 23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통합 우승에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대망의 4차전.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이 계속된 가운데 캐칭이 4쿼터 5점을 집중시키면서 마침내 우리은행은 신한은행에 내줬던 타이틀을 되찾았다. 통산 네 번째 우승에 성공한 것이었다.

기나긴 침체기와 위기극복 노력

이처럼 우리은행 한새여자농구단은 2000년대 초중반 타미카 캐칭이라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와 김영옥, 김계령, 이종애, 김은혜, 김보미 등으로 이어지는 국내 선수의 활약으로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고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고 했던가? 「삼성생명배 2007 겨울리그」를 끝으로 우리은행은 기나긴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2006년 11월 김영옥 선수의 이적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우리은행의 미래를 책임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던 김보미, 이경은 선수 등이 팀을 떠나며 팀 케미스트리가 급격히 와해되었다. 또한 단일리그 도입과 함께 외국인 선수 제도가 폐지되면서 외국인 선수와 국내 선수의 조화를 바탕으로 리그를 제패하던 우리은행의 전력은 급격한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박건연, 정태균 등 새로운 코치진을 영입하여 분위기 반전을 시도 하였으나, 2007년 단일리그가 도입 후 리그 5위를 시작으로 4시즌 연속 꼴찌를 기록하는 등 농구단 최대의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 여자농구 최고의 명문구단으로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은행의 노력은 쉼 없이 꾸준히 이어졌다. 2009년 임영희 선수를 FA로 영입하여 포워드 라인을 강화하고, 박혜진, 이승아, 이정현 등 한국 여자농구를 이끌어 갈 유망주 등을 선발하여 새로운 도약을 위한 토대를 착실하게 다져나갔다. 또한 적극적인 트레이드를 통해 양지희 등 젊고 전도유망한 선수를 영입하여 빠르고 강한 수비를 펼치는 역동적인 팀으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2010년대 사진

극적인 반전

2012년 4월 마침내 우리은행의 재도약을 이끌 새로운 코칭스탭 영입을 발표하였다. 그 주인공은 신한은행 리그 7연패를 이끈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 그리고 여자고교 농구에서 잔뼈가 굵은 박성배 코치였다. 이미 완성된 신한은행 코치라는 편하고 안정된 길을 버리고 만년 꼴지 팀 감독이라는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한 위성우 감독은 한 시즌 만에 만년 꼴찌 팀을 리그 최정상의 팀으로 환골탈태 시키며 '위성우 매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연출했다.

신임 코칭스탭은 비시즌 중 혹독한 체력훈련을 통해 우리은행 특유의 질식수비를 바탕으로 한 빠르고 역동적인 농구를 완성해 냈다. 2012년 10월 12일 구리실내체육관에서 KDB생명과 맞붙은 「KDB금융그룹 2012-13 여자프로농구」리그 개막전은 새로운 우리은행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1라운드 3승 2패로 리그 2위로 예열을 마친 우리은행은 이후 파죽의 8연승을 거두며 리그 단독선두로 치고 나간 이후 단 한차례도 2위 팀의 추격을 허락하지 않으며 24승 11패로 2006년 겨울리그 이후 첫 리그 1위의 기염을 토해냈다. 또한 리그 2위 신한은행을 꺾고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온 삼성생명을 3전 전승으로 가볍게 물리치고 감격의 V5를 달성하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3년 4월 한·중·일·대만 4개국 챔피언들이 용인에서 맞붙은 「2013 Asia W-Championship 대회」에서 4전 전승으로 초대 챔피언에 오르는 등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여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여자농구팀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이러한 우리은행의 반전 드라마는 코칭스탭에 선수단 운영의 전권을 부여한 구단의 과감한 결단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선수들의 패배의식을 떨쳐내고 잠재력을 꽃피우는 데 성공한 위성우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탭의 리더십, 그리고 코칭스탭의 혹독한 조련을 이겨내고 코트에서 최고의 경기를 펼친 선수들이 함께 만들어낸 하모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2012-13시즌 다시 도입된 외국인선수 제도에 따라 영입한 티나 탐슨(Tina Thompson) 선수의 맹활약도 빼 놓을 수 없다.

'토종'의 힘으로 이루어낸 통합 2연패

지난 시즌 챔피언 등극에도 불구하고 2013-2014 여자프로농구 시작을 앞두고 우리은행의 우승을 점치는 전문가들은 많지 않았다. 위성우 감독을 비롯한 주전 선수 대부분이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차출되어 팀 훈련을 충실히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했고, 선발된 외국인 선수도 다른 경쟁팀에 비해 확실한 에이스급으로 평가받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11월 10일 춘천호반체육관에서 열린 신한은행과의 연맹 개막전을 시작으로 개막 9연승을 질주하며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산뜻한 시즌 출발을 알렸다. 3라운드 후반에 들어서는 연승 피로감 및 선수들의 체력 저하로 한 차례 고비를 맞기도 하였지만 올스타 브레이크를 기점으로 혹독한 체력훈련을 통해 미비점을 보완하며 정규리그 1위 자리를 고수하였고 마침내 3월 2일 신한은행과의 춘천 홈경기를 승리로 장식하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또한 3월 25일부터 시작한 정규리그 2위 신한은행과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3승 1패로 우승을 확정지으며 통합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합우승 6연패에 빛나는 신한은행을 마침내 꺾고 챔피언의 자리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하게 우리은행이 최강의 팀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은행의 2년 연속 통합우승은 외국인 선수에 의존하지 않고 임영희, 양지희, 박혜진 등 ‘토종’ 선수의 힘으로 이루어 낸 우승이라는 점에서 더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챔피언 결정전 MVP에 빛나는 임영희 선수는 2013-14시즌에 들어서도 보다 원숙미 넘치고 기복 없는 플레이로 든든한 맏언니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냈고, 양지희 선수도 수비와 공격부분에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기량을 선보이며 우리은행의 골밑을 든든하게 책임졌다.

특히 2013-14시즌 박혜진 선수의 맹활약은 우리은행은 물론 한국여자농구의 미래를 밝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크나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첫 성인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린 박혜진 선수는 국가대표 기간 중 놀라운 기량 발전을 이뤄냈고, 시즌 중 공격과 수비 전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정규리그 MVP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특히 자유투 45개 연속 성공 신기록을 수립하며 한국 여자농구의 장신 가드 개보를 이을 기대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였다.

개막 16연승 그리고 V7

지난 2시즌이 경쟁팀에 추격을 허용하며 아슬아슬하게 정상의 자리를 지켜냈다면, 2014-15시즌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리은행이 명실공히 WKBL 최강팀으로 자리매김한 시즌이었다. 2014년 11월 3일 삼성블루밍스와의 원정 첫 경기를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파죽의 개막 16연승을 기록하며 일찌감치 독주체제를 구축하였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우리'가 해냈다."(조선일보), "개막 16연승…너희를 우리가 넘었다."(동아일보), "기쁘다 16승 오셨네. 우리은 개막 최다 연승"(중앙일보), "'우리' 16연승 신고. 메리 크리스마스"(한겨레) 등 주요 일간지 및 스포츠지에서도 우리은행의 16연승 신기록 달성을 비중있게 소개하며 스포츠계 주요 이슈로 집중 조명하였다.

시즌 중후반 주전 포인트 가드 이승아 선수 등 주전 선수들의 크고 작은 부상과 체력 저하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큰 위기 없이 최강의 자리를 고수하였다. 마침내 2월 23일 KDB생명과의 춘천 홈경기에서 74:71로 승리하며 정규리그 3연패 및 통상 여덟 번째 정규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정규리그 8회 우승은 WKBL 구단 역대 최다 기록으로 정규리그 6회 우승을 차지한 신한은행 및 삼성생명과의 격차를 2회로 늘리게 되었다.

28승 7패로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고 챔피언 결정전에 선착 한 우리은행은 신한은행과 KB스타즈의 승자와 겨루게 될 챔프 1차전을 차분하게 준비했다. 챔프전 상대팀은 전문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정규리그 3위 KB스타즈였다. 정규리그에서도 우리은행에 첫 연패를 안긴 바 있는 KB스타즈는 베스트 라인업 모두 3점슛에 능해 일명 '양궁농구'라는 팀 색깔을 갖고 있는 팀이었다. 3월 22일 춘천에서 펼쳐진 챔프 1차전에서 경기감각이 떨어진 우리은행은 73:78로 KB스타즈에 불의의 일격을 당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벌어진 2차전에서 체력적 우위를 앞세운 우리은행은 타이트한 압박수비와 적절한 함정수비를 통해 KB스타즈 내외곽을 완벽하게 봉쇄하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이후 청주에서 치러진 챔프전 3, 4차전에서도 우리은행은 원정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강력한 압박과 체력적 우위를 앞세워 연승에 성공하며 대망의 통합 3연패 및 V7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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